
일본의 아시카가 막부 무로 마치의 시대
약 1억 2,500만 명의 일본 역사 아시카가 막부 무로마치 시대의 막바지와 다이묘들의 전국시대에 대해 다루어 보겠습니다. 인구수는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2022년 기준으로 글을 썼습니다.
포르투갈 예수회
아시카가 막부의 마지막 세기 동안 일본은 더욱 격렬해진 내전으로 빠져들었습니다. 1467년에 시작된 오닌의 난은 통치자인 쇼군의 계승자를 둘러싸고 발발하였습니다. 다이묘들은 각자 자신들이 선호하는 계승자의 후보자를 내세워 편을 가르며 싸웠고 교토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쇼군은 일본 전역에 걸쳐 수백 개의 독립 자치주를 통치하는 다이묘들에 대해 모든 권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러한 전국시대 동안, 다이묘들은 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서로 싸웠는데 전국시대 초기에 가장 강력했던 다이묘들은 우에스기 켄신과 다케다 신겐이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전국시대의 상징은 바로 다이묘들이 고용한 숙련된 첩자이자 암살자였던 닌자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전설의 주인공이었던 닌자의 은밀한 생활방식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역사적 사실은 거의 없습니다. 다이묘 이외에 저항적 소작농, 그리고 불교 사찰과 연대한 승병도 자신들만의 군대를 양성했습니다. 이러한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는 와중에 1543년 한 무역선이 항로를 이탈하여 일본의 규슈 바로 남쪽에 있는 다네가섬에 도착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세 명의 포르투갈 무역상들은 일본에 상륙한 최초의 유럽인이었으며 곧이어 유럽의 무역상들이 많은 새로운 물품들을 일본에 들여왔는데 이중 가장 주목받은 상품은 머스킷 소총이었습니다. 1556년에 이르러,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군대에서 약 300,000자루의 머스킷 소총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유럽인들이 들여온 기독교는 일본에서 신자가 350,000명에 이르는 상당한 추종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1549년에는 예수회 선교사인 프란시스 하비에르가 규슈에 당도하면서 일본과 서구 사이에 직접적인 상업적, 문화적 교류가 시작되었고 1568년 포르투갈 지도 제작자 페르낭 바즈 도우라도에 의해 서구에서 최초로 제작된 일본 지도가 생겼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은 기독교로 개종시킨 신도들을 발판으로 새로운 거주지를 만들고,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당시 일본의 내전 상태는 포르투갈인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상선과 무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여러 귀족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일본으로 넘어온 초기 포르투갈인들은 마쓰라 다카노부가 지배하는 히라도와 오토모 소린의 땅인 분고 지역에 머물렀습니다. 1561년 오모토 소린휘하의 군대가 약 900명의 선원과 50개 이상의 대포가 있는 세 척의 배를 제공한 포르투갈인들과 연합하여 모지성을 공격하였는데 이 공격은 일본에서 외국 선박에 의해 벌어진 최초의 공격으로 여겨집니다.
1562년 다이묘 중 처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우무라 스미타다가 Dom Bartolomeu라는 이름을 받아들이며 포르투갈 예수회는 그가 지배하는 요쿠세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3년 후인 1565년 유럽인과 일본인 사이에 단독을 벌어진 해전인 후쿠다만 전투는 다이묘 마쓰라 다카노부가 경쟁상대인 오무라 스마타다의 항구인 후쿠다로 무역을 하러 간 포르투갈 상선 2척을 공격한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포르투갈 무역상들은 일본보다 앞선 기술로 대포와 머스킷을 앞세워 다이묘 마쓰라의 배들을 쉽게 저지하여 포르투갈 측에서는 8명의 사망, 마쓰라 측에서는 70명의 사망과 2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교전 이후, 포르투갈 무역상들은 앞으로 일본에서 자신들의 선박 활동을 이어 나갈 안전한 항구를 찾아 나섰고 1571년 오무라 수미타다는 포르투갈 예수회에게 나가사키라는 작은 어촌 섬을 제공하여 포르투갈인들은 이 섬을 6개 구역으로 나누었습니다.
쇄국 정책과 무로마치 문화
포르투갈 예수회는 나가사키를 다른 지역에서 추방된 기독교도들과 포르투갈 상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이용했습니다. 1579년에 이르러, 나가사키에는 4백 채의 가옥이 있었으며, 일본 포르투갈인들은 이곳에서 결혼하여 정착했습니다. 나가사키가 경쟁자인 다카노부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것을 우려한 오무라 스미타다는 1580년 이 도시를 예수회에 직접 맡기기로 결심했습니다. 몇 년 후, 예수회는 자신들이 일본어를 이해하게 된다면 더 많은 사람을 가톨릭교도로 개종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로 인해, 주앙 호드리게스같은 예수회 수사들이 일본어 사전을 편찬했는데, 1603년에 나가사키에서 출판된 사전은 포르투갈어로 만들어진 최초의 서양 언어 사전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