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엄 보고서에 대한 현대 연구자들의 반박 하지만 여러 현대 연구자들은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카리브인들을 죽였다는 윌리엄 영이 주장한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현재 역사학자들은 세인트빈센트에 도착한 대부분의 노예들은 실제로는 다른 카리브 섬들에서 온 것이었으며 노예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세인트빈센트에 정착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도망친 노예들은 근처 섬들의 농장에서 세인트빈센트로 왔으며 노예의 대부분은 오늘날의 나이지리아와 가나 출신으로 바베이도스, 세인트루시아, 그리고 그레나다 등지에서 오랜 세월 노동착취를 당하다가 세인트빈센트 섬에 도착한 이후 카리브인들과 만났는데 카리브인들은 이들을 보호하거나 혹은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면서 같이 살아갔습니다.
카리브인들은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싸우는 동안 이웃 섬에서 온 노예들을 붙잡았고, 그로 인해 많은 노예가 카리브인들의 지역사회에 통합되었습니다. 그러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카리브인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며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다수 남자 흑인들로 구성된 노예들은 아메리카 원주민 여자들과의 관계로 자녀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카리브인들은 자신들의 딸이 흑인들과 혼인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고, 이에 아프리카인들은 여성들을 납치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들이 펼쳐짐에 따라 일부 카리브인들은 도망친 노예들과 평화롭게 살아갔고 또 다른 카리브인들은 노예들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이후 카리브인들은 검은 카리브인과 황색 카리브인이라는 두 파벌로 나누어지면서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에 여러 차례 서로 싸움이 벌어졌는데 원주민과 아프리카 흑인과의 혼인으로 태어난 자손들을 검은 카리브족이라 불렸습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는 17세기 후반부터 세인트빈센트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충돌했습니다. 1710년 프랑스 개척자들은 비공식적으로 섬에서 대지를 경작했고 1719년에는 프랑스 식민지인 마르티니크섬의 총독이 세인트빈센트를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카리브 주민들은 프랑스 군대를 물리쳤으며 1723년에는 영국도 세인트빈센트를 차지하려 했지만 이 또한 카리브인들이 막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1748년 영국과 프랑스는 지배권 다툼을 중단하기로 합의하였는데 세인트빈센트는 어떤 유럽 국가의 통치도 받지 않는 중립적 섬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주변에서 도망친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들은 계속해서 세인트빈센트로 들어왔고 카리브인들과의 결합을 통해 혼혈 집단이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1763년 파리 조약에 따라 유럽, 아시아,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7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물리친 영국이 세인트빈센트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됩니다.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동쪽에 차지한 북아메리카의 땅을 차지하였으며, 프랑스의 권유에 지원을 받은 카리브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영국을 상대로 카리브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카리브 전쟁
1627년 영국이 세인트빈센트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기 시작했을 때 이들은 프랑스인들이 섬에 정착하여 카리브인들과 협력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카리브인들과 유럽인들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검은 카리브인들이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땅에서 거주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윌리엄 영이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검은 카리브족과 가까운 사이였던 프랑스 정착민들은 여욱겡 반대하는 검은 카리브인들의 투쟁을 지원하였고 이러한 흐름은 1769년에 시작된 카리브 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주로 검은 카리브족 족장인 조셉 샤토이어가 이끈 카리브족은 1769년 군대의 조사 원정에 맞서 섬의 풍상측을 지켜냈으며, 영국 식민지 대표자들에게 땅을 팔라는 반복적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카리브족의 효과적 방어와 지역에 대한 영국의 무지, 그리고 전쟁에 대한 런던의 정치적 반대 움직임에 따라 카리브 전쟁은 중단되었습니다. 전쟁은 교착상태로 빠져들었고 전쟁이 일어난 지 4년 후인 1773년 섬의 영국 지역과 카리브족 지역 사이에 경계를 정한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약 20년 후인 1795년 카리브족은 섬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다시 영국에 맞서며 제2차 카리브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 초기 전황은 카리브족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갔는데 카리브족은 킹스타운 인근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배권을 쟁취하였습니다. 영국은 카리브족과 프랑스 군대의 연합에 번번이 작전에 실패했지만 1796년 랠프 애버크롬비 장군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면서, 카리브족의 저항을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카리브족이 굴복한 이후 영국 당국은 세인트빈센트의 카리브족을 추방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는 세인트빈센트에서 카리브족이 더 많은 봉기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1979년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 특색이 뚜렷한 카리브인들을 반란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강제 추방하였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자메이카로 보내졌다가 이후 온두라스의 로아탄 섬으로 옮겨졌습니다. 5,000명 이상의 검은 카리브인들이 추방되었지만 1797년 4월 12일에 추방된 사람들이 로아탄섬에 도착했을 때 섬까지 오는 여정에서 살아남은 수는 약 2,500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숫자는 부족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적고 번성하기 어려운 규모였기 때문에 검은 카리브인들은 온두라스를 지배하던 스페인 당국에 섬에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스페인은 온두라스에 살 수 있는 조건으로 검은 카리브인들을 스페인 군인으로 병합시켰습니다. 검은 카리브인들은 온두라스에 정착한 이후 북쪽으로 벨리즈와 과테말라, 그리고 남쪽으로 니카라과에 이르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안을 따라 뻗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검은 카리브인들은 중앙아메리카 본토에서 가리푸나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광범위한 수가 이민함에 따라 미국은 중앙아메리카를 제외하고 두 번째로 가리푸나 인구가 많은 지역이 되었습니다. 뉴욕시, 특히 브롱크스에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온두라스, 과테말라와 벨리즈에서 온 가리푸나이며 최근에는 더 많은 가리푸나인들이 온두라스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